[2024-06-27] 익숙한 걸 쫓는 귀의 가장 극단적인 예
"눈은 항상 새로운 것을 쫓고, 귀는 항상 익숙한 것을 쫓는다."
...라는 말이 있다. 정확히 누가 한 말인지 기억은 나질 않는데, 나는 이 발언을 예전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그리고 좀 더 지나서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신해철이 한 말로 기억하고 있다.
이건 시각적으로는 인간이 늘 화려한 것을 쫓지만, 청각적으로는 익숙하고 안정적인 것을 쫓는다는 소리다. 단순히 취향이 아니라 뇌분석학적으로도 인간이 가지는 특성을 설명한 표현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권태를 피하기 위해 신선함을 추구하지만, 정작 모든 것이 새로우면 이에서 비롯되는 불안정함과 불편함이 생겨난다. 뇌는 이것을 꺼리는 성질을 갖고 있어 다른 한 켠엔 익숙한 것을 비치해놓고 절대 버리지 않는다는 거다. 시각과 청각은 전혀 다른 감각이지만, 결국은 하나의 성질을 전달하는 다른 통로일 뿐이니까.
실제로 이 표현은 예술을 생산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이라거나, 인간의 산업이 발전하는 과정, 권태로움과 신선함이 가장 부정적이고 긍정적인 이미지의 이면을 살피게 하는 식으로 널리 인용되고는 한다.
뭐 여하튼 간에.
얼마 전에 만화 드래곤볼의 캐릭터 손오공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썼는데, 이 드래곤볼의 손오공이야 말로 "귀는 익숙한 것을 쫓는다"의 극단적인 예일 것이다.
드래곤볼은 작중 40~50 여년의 시간이 흐르는 만화다. 이런저런 외전을 통해 이 폭은 수백년으로 넓어지는데, 이 만화의 주인공은 손오공의 혈통과 관련된 캐릭터들을 손오공의 성우가 모두 담당했다.
그러니까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주인공의 유아기, 아동기, 청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중년기를 성우 한 사람이 모두 담당했다. 거기다 주인공의 두 명의 아들 캐릭터도 담당했고(당연히 이들의 아동기부터 청년기까지 마찬가지로 모두 담당했다), 주인공의 아버지 캐릭터(작중 캐릭터의 나이가 대충 30대 정도 연령일까?), 손오공과 디자인을 공유하는 극장판 악역 캐릭터도 담당했다. 아, 신 시리즈에도 마찬가지로 사악한 손오공 캐릭터가 나와서 그것도 소화했다. 그리고 이 캐릭터들이 기반이 된 다수의 합체캐릭터들도 담당한다. 물론 더 있을 거다.
손오공은 10대 초반에 처음 등장했고(회상장면 등에서 영유아기도 나왔다), 결말부 즈음엔 손녀까지 본 캐릭터다. 이러한 캐릭터를 성우 한 사람이 담당하는 건 사실 굉장히 힘든 일이다. 남성은 변성기를 거치며 그 목소리가 크게 변하는데, 소년기에 맞추면 성인기에 목소리가 어색하고, 성인기에 목소리를 맞추면 소년기에 목소리가 어색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자 성우는 소년 목소리를 내는 경우가 드물고, 여자 성우는 성인 남자 목소리를 내는 경우가 드물다. 애초에 성대가 그렇게 생겨먹었으니까. 흔히 후자의 반례로 자주 제시되는 손오공 자체가 어찌보자면 이러한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셈이다. 손오공은 이런저런 작품 외적인 상황 때문에 성우가 계속 연기를 한 케이스지, 성인 남자 캐릭터에 어울리는 목소리로 채택된 케이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 외의 다른 나라에서 자국의 더빙된 드래곤볼을 보다 일본판 드래곤볼을 볼 경우, 가장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 근육 울룩불룩한 초마초적 남자가 새된 목소리로 액션씬을 소화하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
이건 전적으로 드래곤볼의 연재 과정에서 생겨난 결과아닐까 싶다. (물론 노자와 성우가 소년 손오공을 잘 연기했으니 성립되는 이야기) 애초 드래곤볼은 마주니어편을 끝으로 연재가 종료될 예정이었다. 그러니 에필로그격으로 연재되는 청년기 손오공을 노자와 성우가 연기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드래곤볼은 연재가 연장되는 것으로 결정됐다. 소위 말하는 z편으로 접어든 시점에서 노자와 성우를 손오공이 아닌 손오반만 담당하게 하고, 성인 손오공의 배역은 다른 성우가 담당했다면 위와 같은 상황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두에 말했듯, 귀는 익숙한 걸 쫓기 마련이고, 여기에 더해 일본 특유의 장인문화같은 것이 결부된 것 때문인지- 손오공의 아들 손오반은 물론 성인이 된 손오공도 노자와 성우가 계속 담당하는 상황이 됐다.
베지터 편 이후 여차저차 프리더편에 접어들었다. 손오공의 부재가 눈에 띄는 동안 손오반의 캐릭터는 점점 발전해 서서히 손오공의 후계자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손오공은 초사이어인이라는 각성 이벤트를 통해 그야말로 이전과 비교되지 않는 존재감을 나타내게 된다. 이 시점에서 손오공에서 노자와 성우를 교체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더군다나 그녀는 이제 손오공이 아니라 드래곤볼과 직접적으로 엮였다. 손오공이 나오지 않아도 노자와 성우의 목소리는 드래곤볼에서 계속해서 나왔다는 소리. 그게 손오반인 경우도 있었고, 이런저런 극장판과 tv스폐셜의 손오공이 기반이 된 캐릭터들인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또 연재는 또 연장되었다. 인조인간 편이 되었고, 손오공의 캐릭터는 서서히 현자적 캐릭터의 면면을 갖추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퇴장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소리. 그리고 손오반으로의 후계구도가 더더욱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결국 손오공은 드래곤볼로부터 물러나고, 손오반이 주인공으로 등극한다. 하지만 노자와는 드래곤볼의 새로운 주인공 손오반의 성우로써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또 한 번 연장된 연재를 통해, 이제 손오천이 등장한다. 이미 손오공이 기반이 된 드래곤볼 캐릭터는 노자와가 다 담당하는 것으로 결정된 상황에서 그녀가 이를 담당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손오천은 말 그대로 손오공의 축소판인 캐릭터였다. 그녀가 담당하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다만 청년이 된 손오반을 여전히 그녀가 담당하고 있다는 점과, 손오공이 다시 복귀해서 메인 캐릭터가 된다는 점이 더해지며 다소 괴상한 꼴이 되었다.
그 외에 게임 등의 파생작에 대해선... 대충 생략하자...
어느 순간 드래곤볼을 두고 노자와의 차력쇼라는 이야기가 나왔다고 하면 믿으실지?
물론 다시 한 번 덧붙이지만, 이건 기본적으로 해당 성우가 능력이 있고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좀 더 냉정하게 보자면 범주 밖의 것을 소화했기에 감안한 부분도 없지는 않았따는 것 정도랄까.
실제로 진짜 사이어인이니, 손오공의 소년미를 표현했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나온지도 수십년이 흘렀고. 해당 성우도 슬슬 은퇴를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아니 이미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부터 힘이 달린다는 이야기는 꾸준히 나왔다. 정말 이제 '다음'을 바라봐야 하는 시점이 된 것이다.
진짜 딜레마가 시작됐다. 단순히 남성 외견의 남성 목소리가 주는 익숙함과 소년에서 중년이 되었지만 계속해서 한 사람이 목소리를 연기한 상황에서의 익숙함끼리의 대결이 아니다. 결국 성우는 바뀔 수밖에 없고, 이러한 상황에서 쫓는 익숙함은 반쪽짜리일 수밖에 없다.
상술했듯 드래곤볼이 애초에 작중 시간대로 50여년간 진행될 것이라 제작주체들이 알고 있었다면, 손오공의 성우는 다른 이로 갈렸을 가능성이 어느 정도 존재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손오공 및 그가 기반이 된 캐릭터들을 모두 한 사람이 소화했고, 이는 지금에 와선 괜찮은 결정이었지만, 당대 기준으로 평가하자면 상당히 위험부담이 높은 일이기도 했다. (성우 한 사람에게 제작 비중이 과도하게 높아졌으니)
사실 예전에 했던 생각이기도 하고, 실제로 이젠 해외의 사람들조차 노자와 성우에 익숙해진 상황이라, 다른 여자 성우가 바톤을 이어받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아니면 아예 AI로 목소리를 변조해서 진행할지도 모르는 일. 애초에 지금 드래곤볼에 대해 만인이 납득할만한 의견을 낼 사람이 없는 게 현실이니까.